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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감정으로 읽는 예술영화 - 외로움: 《나이트 온 더 플래닛》(Night on Earth, 1991)

by 쏠쏠한 문화 정보꾼 2025. 12. 20.

감정으로 읽는 예술영화 - 외로움: 《나이트 온 더 플래닛》(Night on Earth, 1991)

도시의 어둠 속에서 서로 스쳐 지나가는 마음의 거리

사람은 혼자 있을 때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고립을 느낄 수 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마음이 멀어질 때 외로움은 더 짙어진다.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은 바로 이 감정의 형태를 다룬 영화다.
도시의 밤을 달리는 택시 안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인물들이 짧게 스쳐 지나가며 드러내는 감정을 통해
외로움이 무엇인지 조용하게 설명한다.

감독 짐 자무시는 이 영화에서
대단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개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대화의 리듬, 도시의 소리, 택시 내부의 조명 같은
미세한 감정 요소를 조합하여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사람들 사이를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은 외로움이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현대인의 삶 곳곳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감정임을 드러낸다.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이 보여주는 도시의 정서적 풍경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은 다섯 개의 도시—로스앤젤레스,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에서
서로 다른 인물들이 택시라는 공간 안에서 만나 잠시 감정을 공유하는 이야기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다.
이 다섯 개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지 않지만
공통적으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결을 공유한다.

도시는 언제나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의 도시는 다르다.
각 도시는 어둡고 고요하며,
익명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지만 정작 감정은 정지된 상태로 묘사된다.
택시는 도시 속을 움직이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제자리에서 헤매고 있으며,
이 감정적 정체가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핵심 역할을 한다.

감독은 도시를 감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경유하는 공간’으로 바라보게 하며
외로움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도시라는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정서임을 강조한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 속에서 드러나는 외로움의 다양한 얼굴

각 도시의 에피소드는 짧다.
하지만 짧은 만남 속에서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은
외로움의 형태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자신의 꿈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여성 운전사의 외로움이 드러나고,
뉴욕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예기치 않은 위로가 되는 외로움의 형태가 담긴다.
파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여성이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듯한 감정적 고립을 표현하고,
로마에서는
과장된 말투로 외로움을 숨기려는 남자가 등장한다.
헬싱키에서는
침묵 속에 스며 있는 비극적 감정이
외로움의 무게를 더한다.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은 이렇게 다섯 가지 형태의 외로움을 나열함으로써
외로움이 단일한 감정이 아니라
수많은 층을 가진 복합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택시라는 좁은 공간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밀도

《나이트 온 더 플래닛》에서 택시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다.
택시는 낯선 사람과 잠시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고,
이 짧은 만남 속에서 감정은 가장 솔직한 형태로 드러난다.

사람은 낯선 사람 앞에서 오히려 더 진심을 말하기도 한다.
일상의 관계에서는 감정을 숨길 수 있지만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타인에게는
억눌렀던 감정을 쉽게 꺼내기도 한다.
이 감정의 즉흥성이 외로움을 더 깊게 드러내며
영화는 이 감정의 순간들을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서로에게 스치고 사라지는지 보여준다.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의 택시는 움직이고 있지만,
관객은 그 움직임 속에서
감정이 오히려 멈춰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 정지된 감정의 순간이 바로 외로움의 본질이다.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도시의 고독이 만나는 순간

영화는 외로움을 정답처럼 정의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들의 말과 행동, 침묵과 표정 속에서
관객이 스스로 감정을 추적하도록 만든다.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의 외로움은
감정적으로 과장되지도 않고,
논리적으로 설명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관객에게 말없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느 도시의 어떤 인물과 비슷한 외로움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외로움은 종종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특정한 이유 없이 찾아오기도 하고,
누군가 곁에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이트 온 더 플래닛》의 강점은
바로 이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감독은 대사보다 분위기, 의미보다 여백을 통해
감정 그 자체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 때문에 이 영화의 외로움은
단순한 고독이 아니라
‘말해지지 않은 감정의 공백’으로 남게 된다.


다음 예고 – 감정으로 읽는 예술영화 ⑩편

후회(Regret): 《인 더 베드룸》(In the Bedroom, 2001)

다음 편에서는 감정 시리즈의 또 다른 결인 후회를 다룬다.
《인 더 베드룸》은 상실 이후의 관계와 감정이
어떻게 후회의 형태로 변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후회는 과거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며,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감정의 무게가 어떻게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지 체감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