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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한국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리뷰: 지옥 끝에서 건져 올린 구원과 추격의 미학

by 쏠쏠한 문화 정보꾼 2025. 10. 17.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리뷰: 지옥 끝에서 건져 올린 구원과 추격의 미학

홍원찬 감독 황정민 이정재 박정민 액션·누아르

총성과 침묵의 간극에서, 한 남자는 마지막 남은 ‘구원’을 붙잡고 달린다. 다른 한 남자는 지옥의 문턱에서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미소한다. 이 추격의 온도는 끝내 우리 마음의 가장 어두운 방까지 스며든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리뷰: 지옥 끝에서 건져 올린 구원과 추격의 미학

1. 프롤로그—지옥과 구원의 접점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Deliver Us from Evil)는 제목부터 기도다. 누군가를 살려달라는 간절한 속삭임이 액션의 볼륨을 점점 키우며, 관객을 숨이 턱 막히는 지점으로 끌고 간다. 홍원찬 감독은 낡은 복수극의 외피를 두르되, 정서의 몸체를 ‘구원’의 언어로 새겨 넣는다. 그래서 총알이 날아다니는 순간에도 영화는 묘하게 고요하다. 인물들의 과거가 파편처럼 흩어질수록, 우리는 그 조각 사이에 숨어 있던 체온을 더 또렷이 느끼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지옥을 하나씩 품고 산다. 이 영화는 그 지옥의 문턱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2. 이야기의 뼈대—한 줄로 세우는 서사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암살자 ‘인남’(황정민)은 마지막 일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려던 순간, 자신의 과거와 얽힌 한 아이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 그 아이를 찾기 위해 방콕과 도쿄를 오가는 지옥 같은 추적에 뛰어든 인남. 그러나 그 뒤를 복수의 화신 ‘레이’(이정재)가 그림자처럼 좇는다. 죽음을 등에 업은 자와 죽음을 끌고 가는 자—두 사람의 궤적이 겹치는 지점에서 영화는 속도를 올린다.

서사는 단순하지만 직선적이지 않다. 방콕의 습기를 닮은 질감 속에서, 인남의 죄의 기록은 아이를 향한 미련과 뒤섞인다. 레이는 미소로 칼을 닦는다. 영화는 이 두 감정선을 평행으로 달리게 한 뒤, 후반부에 바늘귀 같은 교차점을 통과시킨다. 그 순간 관객은 추격의 쾌감을 넘어, 말없이 손을 잡고 싶은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포인트: 줄거리를 과장하지 않는다. 결핍에서 오는 긴장감이 이 영화의 진짜 에너지다.

3. 인물과 연기—황정민·이정재·박정민의 결

황정민의 인남은 말수가 적다. 대신 그의 등과 어깨, 걸음 속에 문장이 있다. 아이 앞에서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빛은, 총을 잡을 때보다 더 잔인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황정민은 ‘피 묻은 구원’의 얼굴을 미세하게 눌러 표현한다. 울컥하는 감정을 끝까지 삼키는 그 표정이 이 영화의 정조를 만든다.

이정재의 레이는 단어 대신 미소로 대사를 친다. 짙은 립스틱 같은 색감의 조명 아래, 레이는 거의 초현실적이다. 그는 ‘악’이라 부르기엔 너무 우아하고, ‘악마’라 부르기엔 너무 인간적이다. 총구를 겨눌 때조차 고요한 그 리듬은 영화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이정재의 레이는 ‘복수의 장인’이 아니라 ‘죽음의 큐레이터’에 가깝다.

박정민의 유이는 이 세계의 가장 따뜻한 중심이다. 소리 없이 인남의 곁을 지키는 그 존재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박정민은 상처를 감추기보단 상처와 함께 숨 쉬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유이는 구원의 실마리이자 인남이 끝내 놓지 못하는 마지막 선이다.

4. 감각의 미학—로케이션·촬영·사운드

이 영화는 공기로 기억된다. 방콕 골목의 습기, 도쿄의 차가운 네온, 한국의 밤이 서로 다른 질감으로 포개진다.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를 적절히 섞은 촬영은 추격의 현기증을 만들어내면서도, 인물에게 지나치게 들이대지 않는다. 거리감의 미덕이 오히려 감정의 울림을 크게 한다.

액션은 화려함보다 무게를 택한다. 총격과 타격의 소리는 장식이 아니라 서사의 추임새다. 특히 허리를 낮춘 근접전과 코너를 꺾는 순간의 질주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몸’ 그 자체의 문법으로 보인다. 음악은 과하지 않게, 그러나 결정적인 장면마다 심장의 박동을 밀어 올린다.

체크: 로케이션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선을 드러내는 두 번째 배우로 작동한다.

5. 명장면 하이라이트—심장이 멈추는 순간들

  • 방콕 골목 추격: 땀이 눈을 파고드는 속도로 카메라가 달린다. 숨이 차오를수록 인남의 얼굴에 새겨지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결의다. 골목의 불빛이 파도처럼 흔들리며, 관객의 심박과 화면의 리듬이 일치한다.
  • 유이와의 짧은 평화: 라면 끓는 소리가 방패가 되는 순간. 작은 식탁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넓은 피난처가 된다. 액션 영화가 가장 강해지는 때는, 폭력 대신 평온이 잘 찍힐 때라는 걸 증명한다.
  • 호텔 시퀀스: 문과 문 사이, 문턱과 문틀의 간격을 치밀하게 활용하는 동선. 레이의 그림자가 먼저 들어오고, 그의 몸이 천천히 뒤따른다. 공포는 종종 실체가 아니라 도착 예정 시간에 있다.
  • 엔딩의 선택: 총성이 멀어지고 파도 같은 침묵만 남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제목의 뜻을 깨닫는다. ‘구원’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라는 것을.

6. 주제의 심장—폭력, 죗값, 그리고 ‘구원’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폭력을 단죄하거나 미화하지 않는 태도다. 인남에게 폭력은 생존의 언어였고, 레이에게 폭력은 신념의 긴장줄이다. 둘의 칼끝이 스칠 때마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는 누구의 죗값을 대신 치러줄 수 있을까? 아마도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장면에서는 ‘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 흔들림이 바로 이 영화의 윤리적 진동수다.

구원은 벼락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작은 손을 잡아 일으키는 일,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등을 떠미는 일, 끝내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일—그런 자잘한 선택이 모여 구원이 된다. 영화는 그 진실을 피와 눈물과 땀으로 써 내려간다.

부록. 관람 포인트 & 한줄평

관람 포인트
  • 연기 합: 황정민의 절제, 이정재의 우아한 잔혹, 박정민의 체온이 만드는 삼각 구도.
  • 질감의 미학: 방콕·도쿄 로케이션이 인물의 감정선을 입체적으로 비춘다.
  • 리듬 액션: 과장보다 동선과 호흡으로 만드는 긴장—‘달리는 마음’을 보여주는 연출.
  • 감정의 여운: 엔딩 후에야 비로소 제목이 몸으로 이해되는 감각.

한줄평: “폭력이 지나간 자리, 아주 조용한 구원이 남는다.”

추천 대상: 액션 누아르의 묵직한 감정선을 사랑하는 관객, 배우들의 ‘표정 연기’만으로도 영화를 본전 뽑는다고 믿는 이들에게 특히 권한다.

※ 본 리뷰는 작품의 주요 전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서술했습니다. 관람 후 다시 읽으면, 장면 속 디테일과 정서의 결이 더 또렷이 보일 거예요.